21세기 독일어권의 대표적인 서사적 소설가 예니 에르펜베크의 『카이로스』가 출간되었다. 2024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을 수상한 작품으로 주목받은 『카이로스』는 “암울하면서도 가장 아름다운 소설”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 사이의 단절된 간극을 깊숙이 파고드는 소설” “시간, 선택, 역사의 힘에 대한 철학적 탐구”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카이로스』는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역사의 격동기를 무대로 펼쳐지는 한 남녀의 만남과 이별을 그린다. 열아홉의 어린 여성과 서른넷 연상의 중년 남성과의 특이하고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독일의 현대사와 절묘하게 결합해냈다. 이러한 파격적인 주제는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행간 사이사이에 숨어 있는 역사적 메타포는 작품의 메시지를 더욱 풍성하게 한다. 파괴적인 사랑과 열정으로 시작한 이 작품은 권력, 예술, 문화, 역사와 함께 한 소녀의 성장에 도달한다.
독일의 현대사와 역사에 얽힌 개인의 삶에 천착해온 에르펜베크의 말에 따르면 이 소설은 “박물관으로서의 소설”이다. 자신의 기억들, 친구들의 기억들, 주변 사람들의 기억들, 어지러웠던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경험과 생각들, 그들이 무엇을 기뻐하고 무엇을 잃었는지를 한 편의 소설 속에 담고자 한 것이다. 『카이로스』는 모든 것이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던 시대의 혼란을 한 남녀의 관계와 교차시켜 보여주며, 6년간 이어진 두 사람의 사랑이 마치 스러져가는 동독의 상징이라도 되는 듯 동독의 몰락과 맥을 같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