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인문과학에서 '번역'이 차지하는 위치는 실로 중대하다. 1950/60년대에 활발히 개발된 컴퓨터 자동번역기술의 능력이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번역은 총괄적인 새 학문으로 부상하였다. 무엇보다도 70년대 중반부터는 번역이 언어학 중심의 "번역학"과 문학과학 중심의 "번역문학 연구"로서 전문화되고, 인접 학문분야, 특히 비교문학, 미학, 철학, 심리학, 사회학 등 제 학문과의 밀접한 연계성을 보이면서 인문사회계 전반의 관심을 끌기에 이르렀다. 1991년 10월, 세계적인 국제 학술진흥기관인 독일의 훔볼트 재단이 "국제문화교류에 있어서의 인문과학 저술의 번역과 문학작품의 번역"이라는 주제 하에 대규모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한 것 역시 이러한 유럽 학계의 동향을 반영한 것이며, 번역연구에 거의 무감각하던 우리나라 학계에 경각심을 일깨우는 중요한 신호가 되었다. 우리는 '기술 선진국' 이전에 '문화 선진국'을 이룩해야 한다.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자주성을 위하여 경제와 기술 경쟁에서 이겨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면, 정신문화 부문에서의 후진성 탈피는 그것의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의 경제·기술 제일주의 하에서는 우리 고유의 정신문화가 실종의 위기에 직면해 있으며,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자연과학과 인문과학의 상호 보완적이고도 균형 있는 발전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현대의 모든 과학과 학문이 유럽으로부터의 수입에서 시작됐다는 사실만을 두고 볼 때에도 번역연구가 중차대함은 말할 필요도 없다. 특히 외국어문학 연구에서 번역은 가장 기초적인 과제다. 그러므로 모든 번역 관련 문헌의 수집은 물론 한국 '번역학'의 개발과 '번역문학 연구'의 체계화는 필수적이다. 이를 토대로 한 번역 대상의 엄정한 선정과 번역의 시행, 그리고 번역 결과에 대해 공정하게 비판할 수 있는 문화풍토의 조성은 우리나라 번역의 질적 향상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번역의 이론과 실천을 이처럼 유기적으로 결합시켜 수행해 나가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협력, 특히 독일의 번역연구소 및 학술기관과의 긴밀한 학술문화교류가 이루어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며,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문학의 독일어 번역과 소개 또한 필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제 '한독문학번역연구소'를 설립함에 있어, 우리나라 번역전통의 '과거 극복'과 번역연구의 '선진화'라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려 하며, 이를 위하여 특히 젊은 후학들의 연구 활동을 지원하고자 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는 우리 민족문화의 주체성 확립과 창달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국제적 우의 및 협조관계를 가능케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한독문학번역연구소'의 활동을 통하여 한·독 양 민족 서로간의 이해를 증진하고 두 나라 국민의 정신적 삶의 질을 높이는 데에도 기여하리라 확신한다.